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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연재)

[해준백기] 쓰다만글

소복히 눈이 내린 아침이었다. 꽃을 보고 반가워 했던 때가 언제인가, 연일 비가 온다며 울상을 지었던 그가 언제였던가. 떨어지는 낙엽에 괜시리 우울해하던 그를 본 것이 언제였지. 해준은 차 위에 내려앉은 눈을 쓸어내리며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의 말처럼, 정말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해준은 그것이 제게 내려진 벌이라 생각했다. 변하지 않아서, 모든 것이 그대로여서, 모든 것이 그를 떠올리게 했고, 모든 순간에 그가 머물렀기 때문에.

다시 볼 수 있을까. 다시 본 다면, 내가 붙잡을 수 있을까, 해준은 기약없는 재회를 상상하며 쌓인 눈길을 지나쳤다.

 

* * *

 

"좋아합니다."

"...?"

"좋아한다구요, 장백기씨. 제 목소리가 작았습니까?"

", 아뇨!... 잘 들렸습니다. 그러니까, 대리니 말씀은...저를..."

"이해가 안갑니까? 좋아합니다. 장백기씨, 장백기씨도 관심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 생각한거라면..."

", , 좋습니다. 저도, 대리님이."

맑고 하얀 얼굴에 붉은 물이 들기 시작했다. 억지로 웃음을 감추려는지 연신 씰룩대는 입꼬리에 저도 모르게 해준은 그 볼을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연애하죠. 장백기씨.

백기는 사수로 2년 겪었던 시간 보다, 연인으로 지낸 반 년 동안 더욱 많은 해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해준은 세심했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런 해준을 보지 못한 채, 냉정하다, 차갑다 말하는 사람들에 속상하면서도, 한편으론 저만 알 수 있는 모습이란 생각에 뿌듯해 혼자 웃음을 짓기도 했었다.

 

"추운데, 머플러는 어쩌고."

"금방 복귀하는 줄 알고, 그냥 나왔네요. 길어질 줄 몰랐어요."

"추위도 많이 타면서, 감기 걸리겠다."

"괜찮아요. 그래도 이렇게 데이트도 하잖아요."

 

혼자 다녀올 수 있는 외근에 종종 해준은 백기를 불러내곤 했다. 부사수에게 일을 가르쳐야 한다는 허울 좋은 구실에, 백기는 주변 사람들에게 여전히 사수에게 시달리는 불쌍한 부사수라는 이미지에 비실비실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짓고 회사 밖으로 나오곤 했다.

오늘은 전혀 백기를 부를 생각이 없었다. 눈이 내리기 전 까진, 어느 밤, 해준의 품에 안겨 잠에 들던 차에 백기는 잠꼬대처럼 해준의 품에서 나직히 말했다. 첫 눈 오면, 꼭 저랑 같이 있어요.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에 첫 눈 로맨스라니, 평소라면 질색했을 말이 백기여서 좋았고, 오늘은 올해의 첫 눈이었다.

 

"회사로 들어가는거 아니었어요?"

"그럴려고 했는데, 안되겠어."

", 무슨 일 있어요? 계약에 문제생겼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너 얼굴 좀 봐, 추워서 다 텄잖아. 바로 들어가자. 부장님껜 말해뒀어."

", 그래도... 저는 좀."

"괜찮다니까. 가자, 집에."

"...네에."

 

차가운 바람에 빨개진 볼이 따끔거렸다. 사실 따끔거려 얼굴이 빨개진건지, 해준의 말에 달아오른건지 알 수 없었다. 해준과 백기만의 은밀한 약속이었다. 해준의 그 말은. 무릎 위에 놓여진 손만 꼼지락댈 뿐 백기는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백기는 해준이 좋았지만, 그만큼 아직 어렵기도 했다.

물론 그런 문제와 해준과의 관계는 달랐다. 해준은 결코 백기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누굴 만나고, 누군가와 사랑을 나누는 것이 처음이라고 제 침대에 누워 셔츠를 벗기려던 해준의 손을 꼭 붙잡고 울먹이던 백기의 고백이 해준은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그리고, 여전히 백기는 그 처음처럼 수줍어하고 어려워함을 모르지 않았다.

 

 

 

 

 

 

 

 

 

 

 

나머진 그날 스벅에서 혼자 달렸던 19금이었다..슬프다..